나는 막차를 탔으니 괜찮은걸까. -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감상 후기

20년의 시간 동안 바뀐 것은 패션업계 뿐만이 아니다.

하미연4분 읽기


이 포스트는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의 스포일러와 주요 대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20년 만에 개봉한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후속작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를 영화관에서 보고 나왔습니다. 1편을 재밌게 봤었고, 예쁜 옷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실사판 크루엘라도 챙겨본 터라 이번에도 영화관에서 봐야지 하고 벼르고 있다가 이제서야 봤네요.

1편을 직장인이 되기 한참 전에 봤던 기억

1편이 무려 20년 전 영화라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시기상 영화관에서 보지는 않았을 것 같고 좀 더 시간이 흘러서 OCN 같은 데서 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렇다 쳐도 직장인이 되기 훨씬 전에 봤을 텐데요. 직장인 되고 나서 보면 왠지 영화가 다르게 보인다는 평을 유독 많이 듣는 영화기도 합니다.

1편이 딱히 엄청 기억에 남았던 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예쁜 옷 구경하는 재미만 기억에 남았죠. 당시에 제가 직장인이 되기엔 한참 먼 나이대여서 그런 걸 수도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1편은 비정상적인 노동 환경에 대한 미화 영화지 않나? 하는 정도의 감상이었습니다. 드라마 미생을 본 감상이 직장인 되고 나서 달라진 거랑 비슷한 맥락이랄까요. (물론 미생은 잘못된 노동 환경이라기보다는 무역업과 IT업의 문화 차이라고 봐야 할 겁니다.)

전편이 만족스러우면 으레 후속편에 대한 감상도 영향을 많이 받기 마련입니다. 전편이 대단히 기억에 남을 게 없었으니, 이번 후속편은 오롯이 후속편 그 자체만으로, 특히 직장 생활 6년차에 접어든 제 경험만을 가지고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전편의 감상에 묶이지 않은 채로 영화 한 편을 본 셈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이 후속편을 더 긍정적으로 보게 만들었다 생각합니다.

패션 업계가 아니어도 이런 위기는 가능하지 않을까

20년의 시간 동안 강산은 두 번 바뀌고, 그 어떤 업계도 많은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패션업계도 예외는 아닙니다. 전통 미디어 파워의 추락, 노동 환경의 상향 평준화, AI의 범람은 패션업계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미란다는 더이상 과거의 미란다가 아닙니다. 광고 없이는 잡지가 살아남을 수 없어서 한때는 자신의 비서였던 사람에게 고개를 굽혀야 하고, 사내 회의에서는 말 한마디마다 '올바르지 않은' 표현을 쓸까 봐 비서의 눈치를 봅니다.

파타고니아 조끼를 입은 채 나타난 새 CEO

모든 이야기는 위기를 극복하는 여정이죠. 이번 영화에서 위기는 Runway 잡지사의 CEO가 바뀌는 걸로 시작합니다. 원래 CEO가 갑작스레 사망하면서 그 아들이 물려받는데, 패션의 F도 모를 것 같은, 파타고니아 조끼를 입고 다니는 경영자입니다. 오로지 장부에 적힌 숫자로만 기업을 바라보는 CEO는 Runway의 온갖 비용을 줄이고, 괜찮은 가격에 기업을 매각할 궁리를 합니다. 그 덕에 미란다는 무려 이코노미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갑니다.

패션쇼 행사장에서 미란다는 매우 유력한 Runway 인수자인 IT 재벌을 찾아가 묻습니다. 설사 Runway를 인수하더라도 우리가 지켜온 전통과 패션에 대한 애정은 지켜주지 않겠냐고. 그러자 재력가는 코웃음을 치면서 말합니다. 미래가 폼페이 화산의 용암마냥 우리를 덮치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이 AI로 대체될 날이 머지않을 거라고.

이 영화에 대해서 재밌었다고 평하실 분들은 자신이 몸담은 업계가 모조리 바뀌고 있는 현상을 바로 지금 온몸으로 겪고 있는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바로 IT 업계에 있는 우리 모두처럼요.

모든 것이 변하기에는 20년은 무슨 3년도 충분하다.

영화에서 패션과 저널리즘이 맞은 변화는 20년 세월에 걸쳐 나타났습니다. 그에 비해 IT 업계에서 AI로 인해 발생한 변화는 불과 3년 만에 20년치 변화를 자아냈죠. 고작 6년차 직장인이면서 이 영화가 그토록 와닿았던 이유는 그 때문일 거라 생각합니다. 바로 그 3년을 지금 이 순간 겪고 있으니까요.

메시지에 비해 몹시 허술했던 해결책

다시 영화로 돌아가서, 주인공은 우여곡절 끝에 위기를 타파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다른 부자 인수자를 끌어들입니다. 이 부자 인수자는 전통적 저널리즘 정신을 갖고 있는 앤디가 Runway에서 쓴 기사에 감명받아 Runway를 다르게 보게 되었습니다. 몇 년 동안 그 어떤 미디어와도 인터뷰를 하지 않았지만 '진심을 담은' 기사 몇 편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다는 거죠. 썩 각본이 면밀하게 잘 짜인 해결책은 아니라고 봅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리뷰 유튜버가 바로 리뷰 영상을 올렸길래 봤더니 혹평 일색이더라구요. 각본이 너무 엉성하다구요. 전하려는 메시지에 비해 해결책은 빈약했습니다. 쏟아지는 명품 브랜드 협찬을 거절할 수 없어서 이코노미 비행기를 타더라도 미란다의 의상과 호텔은 여전히 화려하고, 명품옷 공짜로 주는 상사가 없는 전통 저널리즘 업계에서 일했던 앤디의 옷도 꽤나 화려합니다. 이왕 좋은 메시지를 선택했으면 좀 더 작정하고 현실적인 연출에 힘을 써도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2 스틸컷

그럼에도 메시지 하나만으로 아깝지 않았던 표 값

그럼에도 저는 결과적으로 표 값이 아깝지 않았습니다. 이 영화가 주는 메시지가 너무나 제 일상 한가운데에 있는 메시지이다 보니, 그 메시지가 모든 영화에 대한 감상을 덮어버린 탓이겠죠. 영화가 잘 만들어졌다고 평하기는 어려운데, 끝내는 이렇게 글도 쓰게 만들었으니 제 역할은 한 셈입니다.

막차를 탔다는 안도와 다음 차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사이에서

문제가 해결된 후 돌아오는 길에 미란다가 앤디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가라앉는 타이타닉 호 옆에 떠 있는 판자를 잡은 거야. 지금은 저 사람이 우리를 그대로 두겠지.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이 바뀔 거야. 하지만 어쩌겠어. 난 이 일을 너무 사랑하는걸." 기억나는 대로 적은 거라 아주 정확하진 않지만 대략 이런 대사였습니다.

"내가 막차를 탄 것 같다"는 말

요즘 직장인들끼리 모였다 하면 AI 때문에 바뀐 세상에 대해서 자주 이야기하죠. 그때마다 '내가 막차를 탄 것 같다'는 말을 한 사람들 정말 많을 겁니다. 실리콘밸리에서 대규모 해고가 계속되고 있다지만, 국내는 노동법 환경상 그러지는 못하고 신규 채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거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막차를 탄 덕에 당장은 내 일자리가 안전할 겁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불과 3년 뒤, 5년 뒤에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죠.

매일같이 AI로 무언가 만드는 이유

그래서 매일같이 필사적으로 AI로 무언가를 만들고, 시도하고, 분투하는 이유는 재밌어서이기도 하지만, 내 먹고 살기 생존에 대한 공포를 누그러뜨리기 위함일 겁니다. 나는 AI를 잘 쓰는 편이니 그래도 괜찮겠지, 하는 마음이요.

어쩌면 저 자신도 타이타닉 호 옆에 간당간당 떠 있는 판자 하나를 붙잡은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열심히 헤엄쳐서 살아남든, 나무 판자를 덧대어서 배를 만들어보든 해야겠죠.